숙희야
지워버리고 싶은데 쉽게 지워지지 않는 마음들이 있다.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나 권태, 어떤 그리움이나 슬픔, 그중에서 특히 사람에 대한 집착 때문에 겪게 되는 마음의 통증이 가장 아프다. 그래서 언제부턴가, 그런 마음들 때문에 괴로움을 겪을 때마다 그 마음을 누르는 방법으로 내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. 마음속으로 울부짖듯, 야단치듯 내 이름을 간절하게 부르는 그 방법은 근본적인 처방은 될 수 없었지만 임시처방으로는 괜찮았다. 불편한 마음이 고개를 치켜들 때마다 내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 마음을 눌렀다.
이 그림의 시작은 그렇게 내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. 처음에는 캔버스에 하늘색 물감으로 무수히 많은 내 이름을 적어 넣었다. 지우고 싶은 마음들을 지우는 심정으로 내 이름을 썼던 것이다. 그런데 해놓고 보니 그림으로서의 완성도가 전혀 없었다. 그래서 그것들을 죄다 덮어버렸다. 이름을 썼다가 덮은 화면은 심심해 보여 그것 역시 그림이 될 것 같지 않았다. 그래서 미완성인 채 일 년 넘게 방치했다. 그러던 어느 날, 치명적으로 나를 괴롭히던 마음과 다시 맞닥뜨렸고, 바로 그때 이 그림 위에 다시 <숙희야>를 쓰기 시작했다. 내가 쓴 것은 <숙희야>였는데 정작 그려지는 것은 <숙희야>가 아니라 불덩어리가 되어 미쳐서 날뛰는 나의 거친 마음이었다. 그렇게 정신없이 그리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숙희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, 휘갈겨 쓴 낙서 같은 선들이 캔버스 가득 난무하고 있었다. 그렇게 휘몰아친 순간이 1분이었는지 5분이었는지 모르겠다. 오래 기다렸던 마지막 터치의 순간은 너무 짧았지만 나는 이 그림을 그렇게 완성했다. 완성과 미완성의 구분 또한 내 마음의 변덕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 마지막 터치로 이 그림을 끝냈던 것이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