그림일기1.
45x45cm,캔버스에 아크릴,2023
지워진 그림
한번 지나간 것은 되돌릴 수 없다. 그러므로 지워진 그림은 영원히 지워진 것이다.
내가 발표한 단편소설 <너무 사소한 죽음>의 메시지를 나름대로 표현해 보았던 그림이 있었다. 소설과 그림을 연결한 작업이었기에 나로서는 의미가 있는 그림이었다. 그러나 그런 내용을 전혀 모르는 관람자는 그냥 보이는 그대로의 그림을 볼 따름이었다. 아무튼, 그 그림에 대한 첫 관람자의 반응은 이게 뭐야, 하는 표정이었다. 전혀 아니라는 거였다. 이렇고 이래서 이런 그림을 그렸다고 설명하고 싶은 마음이 아예 들지 않을 정도의 반응이었다. 김이 샌 나는 바로 그 그림을 빨강색 물감으로 덮어버렸다. 그런데 한 번의 붓질로는 밑에 그림이 다 지워지지 않았다. 그래서 한 번 더 칠하려고 하는데 문득 어떤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. 빨강색 물감으로 지워져 이미 그 내용을 알 수 없는, 간신히 흔적으로만 남은 그림 조각들과 빨강색 물감의 이상한 결합. 그 결합들이 이루어낸 미묘한 조화가 또 다른 하나의 그림이 되어 내 눈에 띄었다. 그것은 뜻하지 않게 만들어진 밑그림이었다. 그 밑그림을 최대한 살려 새로운 그림 하나를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.
하나의 그림이 지워진 자리에서 새롭게 탄생한 이 그림은 불태워 없애버리지 않는 한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다. 그러나 이미 지워버린 그림은 완전히 없어진 거나 다름없다. 이제는 내 기억에조차 남아 있지 않은 지워진 그림은, 그 그림을 궁금해할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비밀로 남겨졌다.